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기타 ==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권에서 해당 참사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온갖 대형 사고들을 겪으면서 드러난 김영삼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불운 이전에 진정성의 결여였는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현재 이 사고의 추모 공간으로는 [[롯데백화점 상인점]]과 건너편 교복 대리점들이 사이에 있는 횡단보도 중간 지점 고가도로 하단에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있다. 또 [[달서구]] 월성1동 학산공원 내부에 위령탑이 있어서 여기서 추모 행사를 벌여 왔으나 공식적인 추모 행사는 2005년 10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지 않았지만 20주기인 2015년에 다시 공식적인 추모 행사를 열었다. 사고로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에서도 부속 건물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놨다. 대구의 지하철 관련 사고 중 가장 먼저 발생한 인명 사상 사고다. 이후 2000년에 [[대구 버스 600#s-1.3.1|신남네거리 도시철도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으며 [[2011년]] [[11월 8일]]에는 [[수성구]] 범물1동 [[동아백화점]] 수성점 앞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 현장에서 굴삭기가 작업하던 도중 도시가스관을 파손하여 가스가 누출되었다. 다행히 신속히 밸브를 차단하고 복구해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제2의 상인동 참사가 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도시가스관 등의 지하 매설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 항상 참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길을 가다 보면 붉은 글씨로 '경고! 이곳은 도시가스관이 매립되어 있으니 이곳에서 공사하려면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하시오!'라고 팻말을 설치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당시 사고로 대구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에서는 교사 1명과 남학생 42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들을 잃은 부모들 중 12쌍의 부부가 먼저 떠난 자식의 동생을 낳았다. 놀랍게도 태어난 12명의 아이들 중 11명이 남자아이였으며 아이들과 부모들은 매년 만나 우애를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영남중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아들 김준희, 김준형 군이 둘 모두 등교하던 중에 사고로 사망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김상돈 씨 부부의 늦둥이 아들과 당시 대구대 강사였던 유족회장 정덕규 씨의 늦둥이 아들도 있다.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는 해당 사고로 사망한 지한군과 창윤군의 사연도 추가적으로 알려졌다. 영남중학교는 1997년에 추모 공간인 세심관을 건립하여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시고 사고 자료를 전시하면서 추모 행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영정사진 훼손 등이 심해지자 2015년 20주기 추모식 이후 추모 공간을 교육용 시청각실로 리모델링하고 영정을 모시는 공간은 철거하는 한편 희생자들의 얼굴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건물 중앙에 모시기로 유족들과 협의했다. 리모델링은 2015년 7월부터 이루어질 계획이라고 했다.[* 사실 추모실은 계속 시청각실로 활용되었고 무대에 흰 커튼으로 영정 사진들을 가려 놓아 로비나 건물 외관 정도를 제외하면 추모관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일부 방송 장비를 만지는 인원만 방송실 내의 당시 PC통신에 관한 기록물이나 사진 자료를 보면서 추모 공간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당시 정우진 군은 간발의 차로 학교로 가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나 이후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피해자 사고 이후 유족들이 모여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부실공사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는 직접 세운 단 하나의 건축물을 제외하고 수주가 들어오지 않아 결국 문을 닫게 됐다고 한다. 처음이자 파산할 때까지 직접 만든 단 하나의 건축물은 '''피해자 위령탑'''이라고 한다. 대구 출신 중 사고가 일어난 상인동과 그 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와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당시 영남고등학교의 어떤 교사가 학교를 땡땡이친 학생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여겨 노심초사하다가 건들거리며 늦게 온 것을 보고 한 대 쥐어박았다든가,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자거나 차가 밀려서 용케 살아남았다든가, 승용차가 엔진 문제를 일으켜 브레이크를 걸면 시동이 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받지 않게 돌아갔다가 사고를 피했다든가, [[앞산순환로]]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커다란 게 바로 앞에 떨어져서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복공판으로 추정되는 철판이 있었다든가와 같이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한 이야기들이 대다수다. 특히 영남고등학교나 영남중학교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짬날 때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사고 현장 바로 옆에 있던 학교인 데다가 사상자도 많이 나왔고 해당 학교가 사립학교라 장기 근무를 하는 교사도 많아서[* 5년마다 전근을 가는 공립과 달리 사립학교는 본인이 원하고 별 문제가 없으면 한 학교에서 퇴임까지 쭉 근속할 수 있다.] 사고를 직접 본 교사들이 직접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인 '푸른 신호등'의 당시 진행자였던 지역 연극배우 겸 MC인 류강국 역시 이러한 해프닝을 증언했다. 그는 방송을 끝낸 뒤 또 다른 공포에 휩싸였는데 사고 지점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이집을 다니던 5세 딸이 '''아침에 타는 통학버스가 상인네거리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으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 혹시나 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이는 '''바로 딸이었다.''' "아빠야~ 여기 꽝했어"가 딸이 건넨 첫 마디였다고. 알고 보니 그 날따라 차량 정체로 어린이집 차가 늦게 왔고 차를 타기 전에 폭발 사고가 나서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사 발주처인 [[대구백화점]]은 판매점 확대와 외지 업체 방어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상인점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보상금만 400억 원을 지급하는 등 회사 전체가 큰 위기에 빠져 부지를 내놓아야 했고, 결국 해당 부지가 [[롯데쇼핑]]에 낙찰되어 현재의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됐다.[* 실제로 [[롯데백화점 상인점]]은 어딘가 타 시도에 위치한 [[롯데백화점]]과 다르게 외형이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벽을 손 봐도 뼈대가 [[대구백화점]]이 만든 형태라 그런 듯. 다만 대백은 삼풍과는 달리 회사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19년 후 이 사고가 아닌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의 개점으로 [[풍전등화]] 신세에 처한 상태다. 결국 적자가 심해지자 본점을 매각 폐점하고 대백프라자점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말았다. 사실상 [[그랜드백화점]]과 같은 행보가 된 셈이다.] 해당 부지를 우선적으로 환매할 수 있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에 끝내 되찾지 못했고 강력한 경쟁자인 롯데백화점을 대구 시내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http://www.idaegu.com/?c=5&p=2844&sort=d_regis&orderby=desc&uid=58659|관련 기사]] 여러모로 대백에게는 굉장히 쓰라린 기억이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롯데백화점에서 참사 희생자들의 유령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2020년대가 되어서는 뜸하다. [youtube(ThgCpTlbee0)]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3년 4월 20일 방영분에서 '8cm가 부른 죽음'[* 가스관에 뚫린 구멍 크기가 '''8cm'''였기 때문에 제목이 '8cm가 부른 죽음'이 된 것 같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고에 대해 다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